'막내 의형제' 차지철 vs '양아들' 전두환

Published: 22 Febr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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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철 vs 전두환
막내 의형제와 양아들의 권력다툼 승자는?
김재규가 아니었다면 전두환이 차지철을 죽였을 것?

전두환의 직속후배가 될뻔한 차지철

1931년생인 전두환은 1951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교합니다.
당시는 한국전쟁중이었는데,
전쟁터에 끌려가지 않고 안전한 진해에서
그것도 무료로 4년간 숙식을 보장받았기에
육사입교는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다만 전두환은 보결충원으로 겨우겨우 합격했고,
이후 육사 졸업 등수도 최하위였습니다.
전두환보다 3살 어린 1934년생인 차지철은
1952년 육사 12기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낙방했습니다.
이런 연유로 차지철은 육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육사에 떨어진 차지철은 이후 포병간부시험에 합격해
포병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만약에 1952년 차지철이 육사에 들어갔다면
전두환의 바로 밑 후배기수가 되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역사는 상당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미국서 만나게 된 차지철과 전두환

차지철과 전두환은 대위시절 처음 만나게 되는데,
그것도 미국에서 만나게 됩니다.
차지철과 전두환은 1960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군사교육을 함께 받게 됩니다.
이때 차지철이 미국 교육생과 시비가 붙었는데,
차지철이 덩치가 큰 미국 교육생을 엄청나게 두들겨 팼고,
이로 인하여 차지철은 퇴교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 전두환이 주동이 되어 한국 교육생들이 적극 나서서
인종차별로 불거진 것이라며 차지철을 변호해 퇴교를 막아주었고,
이로 인하여 차지철은 전두환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박정희와의 인연의 시작

차지철은 5.16 군사정변 이전에는 박정희와 친분이 거의 없었는데,
5.16 때 쿠데타 주모자중 한명인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이
부하인 차지철에게 박정희의 경호업무를 지시하면서
차지철과 박정희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차지철은 머리도 좋지 못하고 키도 작았지만, 무술실력은 엄청났습니다.
태권도와 합기도가 각각 5단, 검도가 3단, 도합 13단이었습니다.
그랬기에 박치옥이 차지철을 경호장교로 천거한 것입니다.
군사정변 과정에서 우연히 찍힌,
가슴에는 수류탄을 달고 양손을 허리에 짚은 채 서 있는
차지철의 모습은 지금도 엄청난 위압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미래의 운명을 예견한 것처럼
차지철은 박정희의 마지막 경호실장으로 남게 됩니다.
차지철이 박정희와 사업적으로 인연을,
즉 혁명이라는 사업을 통하여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면,
전두환은 박정희와 사적으로 처음 인연을 맺게 됩니다.
1959년 이순자와 결혼한 전두환은,
그 직후 장인인 이규동 준장의 손에 이끌려
6관구 사령관을 만나러 가게 되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였습니다.
이규동은 박정희보다 6살 위였지만,
둘다 경북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만주군 근무경력을 갖고 있었고,
더욱이 둘은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 동기였습니다.
이때 박정희는 친한 선배의 사위이자,
같은 동향 출신 후배인 전두환 중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지,
자신의 부관이 되어 달라고 제안했으나,
전두환은 자신은 부관 체질이 아니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뒤 5.16이 일어났는데,
전두환은 박정희와 인연을 맺을 운명적 기회를 날린 셈입니다.

기회를 날린 전두환, 더 큰 기회를 스스로 만들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권력욕이 넘치고 눈치가 빨랐던 전두환이었습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전두환 대위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ROTC 교관으로
군사정변에 참여할 신분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군사정변 당일날 아침 전두환은 육군본부로 달려가
박정희와의 면담을 청합니다.
이전에 장인을 통하여 박정희와 개인적 연을 맺은 적도 있지만,
마침 박정희의 전속부관이 전두환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형제처럼 운명을 같이 하자 약속하던 손영길 대위였습니다.
당시 쿠데타 지도부는 곤경에 빠져있었습니다.
장면 총리는 도주하여 그 행방을 알수 없었고,
미국측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쿠데타 진압명령을 내리라고 계속 압박을 가하고,
한국 군전력의 80%을 갖고 있는 1군사령관 이한림 중장은
부대를 이끌고가 박정희 쿠데타를 진압하겠다고 선포한 상태였습니다.
쿠데타 지도부는 이런 상황에서
젊고 정의로운 이미지의 육사생도들이 5.16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면
대내외적으로 혁명의 정당성을 홍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육사생도들은 이에 동조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를 알게 된 전두환은 곧바로 육사로 달려가 육사생도들을 설득하는 한편,
당시 육사교장인 강영훈 중장이
금족령을 내려 육사생도들의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쿠데타 지도부에 밀고해 강영훈이 구금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의 설득으로 육사생도들은
그 다음날 아침 동대문에서 시청앞까지 시가행진을 벌이게 되고,
이 시가행진으로 그때까지 중립적이거나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군내 실력자들과 외국인들은 이제 5.16을 기정사실화 하게 됩니다.
그리고 5.16 성공의 피날레와 같았던 이 시가행진을 이끈 전두환은,
박정희라는 최고의 후원자를 얻게 됩니다.

막내 의형제 차지철과 양아들 전두환

차지철 대위와 전두환 대위는 5.16 당시 30살 전후로
쿠데타에 참여한 이들중 가장 젊은 축이었습니다.
혁명이 최종적으로 완성되자 박정희는 이 둘에게
정치권에 진출할 것을 권유합니다.
이때 차지철은 박정희 권유에 따라 군복을 벗고 정치권으로 나가고,
전두환은 군에서 출세하고자 군에 계속 남겠다고 대답합니다.
이때 똑같은 대위신분인 이 둘의 서로 다른 선택은
그 이후 하늘과 땅만큼의 엄청난 신분 차이를 낳습니다.
군으로 돌아간 전두환은 이제 박정희라는 든든한 백으로
동기들중 가장 빠르게 진급하며 군내 최고 요직을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전두환은 수시로 청와대로 박정희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박정희도 전두환이 승진하나 전근가면 따로 불러 금일봉을 건네거나 파티를 열어주고,
친필로 전두환에게 위문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박정희는 마치 양아들과 같이 전두환을 키워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전두환의 고속출세를 능가한 이가 있었는데, 바로 차지철이었습니다.
차지철은 혁명동지의 일원이고 그중 가장 어린 축이었기에
박정희에게는 의형제중 막내와 같았습니다.
차지철은 1963년 6대 총선에서 전국구로 당선된후
지역구 후보로 출마해 겨우 30대에 4선의 국회의원이 되고,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등을 역임합니다.
전두환이 박정희의 후원으로 군내 요직을 두루 섭렵했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일개 영관급 장교에 불과합니다.
4선의 중진의원인 차지철과는 그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차지철은 의정사상 최연소 국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차지철에 대한 신임이 엄청났고,
이에 보답하듯 차지철은 국회내에서 박정희 전위대가 되어 종횡무진 활약합니다.
그리고 1974년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해 박종규가 실각하고
차지철이 그 후임으로 경호실장이 되며 2인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차지철은 왜 전두환을 불러들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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